2008년 05월 04일
[단편] 잿빛 눈물 제 1장, 작가 : 야쇼우 시게루
원제(原題) : 灰色の涙 작가(作者) : 弥招 栄
원작 링크(原作 リンク): http://ncode.syosetu.com/n2438c/
이 작품은 [미치노쿠 예능축제 불꽃놀이 대회]를 위해, 카제우미 나츠메 선생님의 플롯을 원작으로 하여 써졌습니다.
잿빛 눈물
야쇼우 시게루 지음
Yi. J-p 옮김
제 1장 : 오디션
……우와, 실물이잖아.
코우라쿠엔에 있는 스튜디오. 나이에 비해 꽤나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곤 하는 카노토의 동안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것은 비단 그 혼자만의 사정이 아니다. 스튜디오의 벽을 따라 한쪽으로 늘어선 젊은이들도 하나 같이 그와 같은 모습이다.
―왜 이런 작은 배역의 오디션에까지 저 사람이 있는 거야?
기본적인 연습과 카메라 테스트를 끝내고 이제 면접이 남아있을 뿐. 그 때문에 이쪽 방으로 자리를 옮긴 터였는데―
카노토의 바로 앞에서 평범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헐리웃 배우이자 아카데미 감독이며 카노토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단역을 얻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고 있는 영화의 제작총지휘를 맡은 윌리엄 매니 본인이었다. 코가 성긴 스웨터에 빛바랜 청바지 그리고 스니커 차림. 나이가 들었다곤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 매그넘을 갈겨대던 시절과 다름없는 눈빛. 아, 그를 만난 것만으로도 오디션에 온 보람이 있는 걸. 카노토가 이런 생각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무 살에 대학을 그만둔 채 연극계에 뛰어든 지가 벌써 10년. 잘될 떡잎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무명 배우인 카노토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는 구름 위의 인물 정도가 아닌 신 그 자체라 하는 편이 좋을 정도였다.
그런 그를 포함한 풋내기들의 주목을 받고 있던 신은 그의 양편에 나란히 앉은 스태프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일어선다. 아마 통역일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전 내용이 일본어로 제작된다. 원폭을 투하하는 쪽 그리고 맞는 쪽. 각각의 시점을 각각의 영화에 담는다는 계획인 듯했다. 백악관과 *에놀라 게이의 기지가 있었던 테니안 섬을 무대로 삼은 미국 쪽의 촬영은 이미 크랭크인하였다고 한다. 저쪽 팀은 물론 오직 미국인으로만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이쪽은 캐스트는 물론 주요 스태프의 대부분을 일본인이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디션 조건에 영어구사에 관한 제한은 없었다. 이러한 조건이 아니었다면 영어라고는 굿모닝과 아이러브유 정도 밖에는 모르는 카노토가 헐리웃 영화의 오디션을 받는 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그 때 카노토는 회장안의 묘한 분위기를 깨달았다. 어라?
“콘도 카노토씨?”
조금 성의 없는 통역의 목소리.
“……저, 저요? 네, 넷!”
당황한 기색의 그의 대답에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회장에 울린다. 카노토의 얼굴이 단번에 벌겋게 물들었다. 왜 처음인거야. 왜 알파벳 순서가 아닌 거냐고. 방금 전까지는 그랬잖아. 이제와 분을 내보아도 멍하게 있던 그의 실수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조급히 신의 면전 앞으로 나선다.
“에, 콘도 카노토. 극단 신게키자 소속입니다.”
“미스터 매니가 인터뷰 할 겁니다. 편하게 들어주세요.”
통역은 그리 말하곤 어깨를 두세 번 들썩이며 웃어보였다. 카노토는 슬쩍 신의 눈치를 보았다. 투명한 빛을 발하는 눈빛. 잡아 끌은 듯한 같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는 것 정도가 한계다.
신께서는 카노토에게 시선을 맞춘 채로 통역에게 무언가를 전했다.
“자네는 아아, 히로시마 출신이로군.”
“그렇습니다. 미스터 매니.”
“빌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빙긋 웃으며 입을 연 신의 어색한 일본어 발음에 오히려 카노토는 긴장했다.
“예, 예스. 빌”
통역이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는 서둘러 얼굴 표정을 바로 잡는다.
카노토가 이 오디션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히로시마가 배경인 영화를 찍는데 히로시마 출신이라면 유리하지 않을까라는 것. 물론 그런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뼛속까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단역 정도는 끌어올 메리트가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네는 원폭에 불타버린 고향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리 질문 받은 카노토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니…….
그가 태어난 무렵의 히로시마에는 이미 원폭의 상처는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원폭 돔도 있고 섬광에 불타버린 사람의 그림자가 남겨진 계단이라든지 피폭된 건물도 몇 개인가 남아있다. 그 정도야 알고 있었다. 평화교육의 일환으로 평화공원의 자료관에도 몇 번인가 갔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에게 있어서 그저 부서진 폐건물이었고 기분 나쁜 자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부흥 사업은 끝났었습니다. 백년은 잡초도 자라지 않을 거라 일컬어지던 도시를 그렇게 빨리 수복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통역과 신 사이에 이야기가 오고간다.
“자네의 가족들은 피폭 체험자인가?”
“네. 부모님모두.”
빌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흥미롭다는 듯이 카노토를 바라본다.
“자네는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음, 물론 용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쟁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아, 아뇨. 역시 핵병기는 사용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노토의 등허리로 차가운 땀이 흐른다. 히로시마에서 자란 탓에 보통의 일본 사람들 보다는 원폭에 대해 배워왔을 터인데. 틀에 박힌 단어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사람들은 세계에서 핵병기를 없애야 한다며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그 말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나?”
“매우 힘든 일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꼭 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핵의 저지력에 의해 세계 평화가 유지되고 있지 않나. 만약 핵을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해도 그 탓에 일어날 전쟁을 자네는 용인할 수 있다는 건가?”
“아뇨, 그건…….”
빌은 일어나 카노토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키가 작은 카노토의 시선에 맞추듯 조금 허리를 굽히고 말을 잇는다. 조금 뒤쳐진 통역이 이어졌다.
“원폭을 투하한 시점에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나. 만약 그 결정이 없었다면 오히려 백만을 넘는 귀중한 생명을 잃게 되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네. 그 뿐이 아니야. 핵의 위력이 분명히 증명됨으로서 그 이후로 세계적인 규모의 대전은 일어나고 있지 않네. 즉, 몇 천만 어쩌면 몇 억의 생명이 전쟁의 희생이 되는 결과를 피한 셈이야. 이것은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덕이라고 생각되지 않나?”
“그게 아닙니다!”
카노토는 얼떨결에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빌이 말에 일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 불현듯 아버지의 모습이 스쳤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황소 같은 고집밖에 없는, 카노토가 결심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결코 인정해 주지 않았던 그 아버지. 카노토는 나이 들어 태어난 늦둥이였기에 아버지의 나이는 벌써 일흔을 넘게 헤아리고 있었다. 원폭의 열선을 쬐였을 때가 그의 나이 10살. 그 이래 아직도 왼팔에 남아있는 **켈로이드. 카노토가 어린 시절 단 한번 보았던 아버지의 눈물. 피폭 후유증에 의해 백혈병으로 죽은 카노토의 어머니의 머리맡. 항암제에 부작용으로 머리털 하나 남지 않은 아내의 머리맡에서 두 손을 모으고 소리 죽여 울던 아버지의 모습.
“무엇이 아니라는 거지?”
“만약 지금의 평화가 그 8월 6일의 사건 때문이라 해도”
카노토는 빌의 푸른 눈동자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것은 결코 미국의 원폭 덕분이 아닙니다. 열선에 불타고 폭풍에 휩쓸려 죽어버린 사람들이, 방사능에 범해져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괴로워한 사람들이, 그 수십만의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기 때문이겠죠. 그런 것도 모르는 당신이 히로시마에 관한 영화를 찍겠다니 웃기지마십쇼! 당신 같은 인간들이 찍을 영화 따위 이쪽에서 거절하고 말겠어!”
카노토는 다시 한 번 빌을 노려보고는 그대로 발꿈치를 돌려 출구를 향했다. 벽에 줄지어 선 배우들의 보내는 어이없다는 시선을 받으며, 스튜디오의 두꺼운 문을 젖히고 그대로 빠져나온다. 때맞춰 2월의 차가운 바람이 카노토의 몸을 파고들었다. 한순간 끓어올랐던 머리가 식어간다.
“아아……”
카노토는 두꺼운 구름에 덥힌 하늘을 바라보곤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도로 위에 쭈그려 앉는다.
“저질렀구먼. 단장한테 된통 욕먹게 생겼네.”
신게키자에 오디션 합격의 통지가 온 것은 이주일 후의 일이었다.
* 에놀라 게이 : Enola Gay.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B-29 폭격기의 애칭.
** 켈로이드 : 외상, 화상 후에 생기는 피부의 결합조직이 증식하여 딱딱해진 양성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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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5/04 00:03 | 야쇼우 시게루(弥招 栄)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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