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잿빛 눈물 제 3장, 작가 : 야쇼우 시게루

원제(原題) : 灰色の涙    작가(作者) : 弥招 栄

원작 링크(原作 リンク): http://ncode.syosetu.com/n2438c/


제 3장 : 아버지



 “여보세요.”

 “아, 저에요.”

 “어어―”

 전파 너머에서 들려오는 가래 끓는 쉰 목소리.

 “무슨 일이냐?”

 카노토는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언제였을까? 신정에도 지난해 한가위에도 전화 한통 하지 않았었다. 가슴 깊이 각인되어 있는 기억은 대학을 그만두고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을 전했을 때의 일로서 끝내는 분노와 실망을 억누른 채 자포자기했던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몇 번인가는 찾아 갔었고 그 갑절 정도 전화를 했을 뿐이었다. 끊어질 듯 이어져왔기에 느낄 수 있는 시간의 흐름. ―늙으셨구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감상을 떨쳐낸다.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괜찮아?”

 “그래? 좀 기다려봐라.”

 덜그럭 덜그럭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삐걱대는 소리. 아아― 문뜩 싱크대 옆에 놓여 있던 의자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삐걱대는 소리는 카노토의 기억에 남아있던 것보다 많이 약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르신건가. 수화기 너머에서 반복되는 둔탁한 기침 소리. 그 때마다 삐걱대는 의자.

 “괜찮아? 감기인거야? 몸 좀 조심해.”

 “네가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딱딱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역정이 인다. 눈앞에 완전히 해가 저문 거리를 어쩐지 즐겁게 웃고 떠들며 지나는 소녀들이 보였다. 카노토는 살짝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저기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물은 적도 없었고 아마 떠올리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무슨 뜸을 이리 들이는 거냐?”

 “……아버지가 원폭 맞았을 때 이야기 좀 들려주지 않겠어?”

 후, 하며 전파에 공백이 생긴다. 험, 험 목을 울리는 소리. 그것이 거리의 소란스러움을 압도한다.

 “왜 그런 걸 묻는 거냐? ……이제 와서.”

 카노토는 조금 움찔했다. 그 목소리에서 나이 들어 늙어버린 아버지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 것이다.

 “나 이번에 영화에 나오게 됐거든. 윌리엄 매니라고 들어봤어?”

 “모른다.”

 딱 부러지는 부정의 한 마디. 하지만 NHK의 TV 연속극만이 낙인 아버지라면 모를 법도 했다. 카노토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미국 헐리웃의 굉장한 배우인데. 그 사람이 이번에 찍는 영화에서 내가 꽤 좋은 역을 받았어.”

 카노토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참았던 숨을 내뱉듯 한 번에 이야기를 전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데에는 대학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전할 때보다도 더욱 큰 다짐이 필요했다.

 “원폭으로 가족을 전부 잃어버린 남자의 역할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수화기의 건너편으로 귀를 기울였다. 정적을 압도하는 거리의 소란스러움.

 “이 영화 나한테 있어서 엄청나게 큰 찬스야. 헐리웃 감독이 전편 일본어로 된 영화를 찍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고. 반드시 일본에서 화제가 될 거고. 거기서 내 연기가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네 녀석은 딴따라가 돼서 창피를 끼친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피카가 터졌던 사건까지 욕보이려는 거냐!”

 갑작스런 아버지의 노성이 카노토의 귀를 강타했다. 목소리 자체가 컸던 것은 아니었지만 순간 카노토의 얼굴에 혈기가 치솟았다.

 “그런 게 아니라고!”

 소란스러움에 지지 않도록 소리를 높인다. 잔뜩 힘을 주어 잡은 핸드폰이 우득하는 소리를 낸다.

 “이번에 극단에서 나왔어. 그렇지만 그만두겠다는 생각으로 나온 것은 아니야. 아무리 작은 기획사에 들어가더라도 배우는 계속 할 거라고.”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기라도 하듯 카노토는 말했다. 아라타의 생각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소속은 없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 그런 발 디딜 곳 없는 상황에는 익숙지 않았다. 매니지먼트는 영화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유지해주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자신이 더 이상 신케키자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거라고―”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똑바로 말해 봐!”

 “감독은 내가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2세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내가 이 역에 지목된 거라 생각해. 하지만 나는 그 때 일을 모르겠다고. 하지만 아버지라면……”

 “피카를 떨어뜨렸던 미국의 영화에서 뭘 하겠다는 거냐? 네 어미가 왜 죽었는지 잊어버린 게냐?”

 “잊지 않았어! 미국도 뭐도 관계없어. 연기는 내가 하는 거라고!”

 흥미로운 듯 파고들어오는 빌의 푸른 눈동자. 마음속으로 그를 노려본다.

 “감독이 무슨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지, 내가 나올 장면이 어떻게 될지 아직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히로시마의 사람으로서, 원폭 2세로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으로서 연기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거라고!”

 스스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와 카노토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진심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돌아갈 곳, 믿을 것, 그것들을 잃어버린 지금. 의지할 것은 자신의 뿌리 밖에는 없었다. 그렇기에 카노토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 원폭이 뭔지 그날 히로시마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건 알고 있지. 하지만 알고 있을 뿐이야. 나는 그 날을 느끼고 싶다고. 아버지가 봤던 그 날을 나도 보고 싶어. 오로지 무섭고 잔혹했던 모습이 아닌 그런 모습을 나도 보고 싶다고. 아버지, 그래야만 나는 처음으로 나의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

 카노토는 치익―하는 소리만을 내고 있는 회선이 끊어진 휴대폰을 닫았다. 수화기를 온 후크 시켜둔 소리가 멈추지 도 않고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어느 새인가 쓰러질 듯 수그러든 몸을 펴 다시금 빌딩 벽에 몸을 의지한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차가운 바람.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거리의 불빛. 거리를 지나는 인파가 만드는 소란스러움. 그곳에는 재 섞인 뜨거운 바람도, 태양을 가리는 검은 버섯구름도, 불타버린 사람들의 신음소리도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변하지 않은 현실. 평화로운 일본. 카노토는 조금 어깨를 떨어뜨린 채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음 날부터 카노토는 있는 대로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면 스스로 그 날을 찾는 수밖에는 없다. 원폭에 대한 것이 아닌 그 시절의 자료는 닥치는 대로 접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는지 또 무엇을 꿈꾸며 살아왔는지. 그것들을 무미건조한 데이터 속에서 그리고 체험자가 남긴 이야기에서 조금씩 수집해간다.

 도쿄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전 동아리의 존재로 알게 되었다. 피폭당한 스스로의 체험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그것을 구전하기로 결심한 사람들. 바로 만날 약속을 잡고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체험자의 입에서 직접 듣는 이야기는 종이에 써진 체험담 이상으로 마음에 강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야기에 이골이 나버린 말투와 때때로 삽입되는 정치적인 주장은 감정에 찬물을 끼얹듯 현실로 귀환시켰다. 부풀어 오른 지식만이 마치 앙금처럼 카노토의 마음에 쌓여간다.

 히로시마로 가볼까. 카노토는 그의 싸구려 자취방의 바닥에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자료를 베게삼아 누운 채 중얼거렸다.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통장을 떠올리고는 한숨짓는다. 그래도 평화공원의 기념자료관에는 한 차례 다녀오고 싶은데. 어린 시절에는 시선을 피하며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썼던 유산들을 이번에는 제대로 마주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가사키에도……. 돈을 빌려줄 것 같은 친구의 얼굴을 한 명씩 떠올려보았다. 출세는 확실하다고. 갚을 날만 재촉하지 않아 준다면…….

 그렇게 멍하게 잠에 빠져들면서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히로시마의 거리를 걷는다. 봉오도리 상점가를 지나서 원폭 돔 오른편의 모토야스 다리를 건넌다. 주변에 있는 어른들의 얼굴이 꽤나 높은 곳에 보인다(내 어릴 때인가). 무척이나 그리운 따듯하고 부드러운 손에 이끌려(엄마?), 종이학을 들고 있는 **원폭의 아이 동상을 지나 평화의 불을 힐끗 쳐다보고는 기념자료관 앞의 광장으로 향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의 무리가 돌바닥 광장을 가득 채운 채 융단처럼 움직인다(꽤 예전에는 히로시마 안은 비둘기로 가득했었지). 붙잡고 있던 손이 건네준 봉지에 작은 손을 넣어 모이를 쥐곤 에잇! 하며 뿌린다. 밀물처럼 몰려들어서는 모이를 두고 다투는 비둘기들을 반쯤 무서워하면서도 깔깔대며 신나게 소리친다. 하지만 그 순간 비둘기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지저분하게 물때가 낀 천장을 바라보며 카노토는 눈을 떴다. 시계를 보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현관문 밖에서 들려왔다. 집배원이 집어넣은 봉투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져 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뭐지? 카노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떨어진 우편물을 주웠다. 서투른 글씨로 쓰여 있는 받는 사람 란에는 콘도 카노토. 틀림없다. 뒤집어서 보낸 이를 확인했다.

 콘도 로쿠로.

 아버지? 카노토는 서둘러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연필로 쓰인 몇 장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지우고 썼던 자국.

 그날 일어난 일. 그날 보았던 일. 그날 느꼈던 일. 불타버린 거리. 붕괴된 다리. 죽어가는 사람들. 살아있는 자신. 더듬더듬 쓰여 가는 기억.

 피폭자에 대한 편견. 원폭 후유증에 대한 공포. 신체에 남은 피폭의 흔적. 아내가 된 여성과의 만남.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기쁨. 아이의 이름에 새겨 넣은 바램. 다시 찾아온 상실의 슬픔. 서투르게 이어지는 이야기.

 그날 밤 카노토는 몇 번이고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

 꿈속에서 카노토는 영화의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 속의 카노토는 가족과 함께였다. 그 곳에서 카노토는 가토 타다시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인 사에와 장인인 겐지가 있다. 원폭에 의해 이윽고 사라져버릴 것이 분명한 행복한 풍경. 어느 틈엔가 스크린은 사라시고 카노토와 타다시는 포개어지듯 하나가 되었다.

 ―이제 할 수 있어.

 동이 텄을 때에는 이미 히로시마를 찾아가려는 생각은 사라진 후였다.






*피카(ピカ) : 피카돈(ピカドン). “맨발의 겐“에 나오는 원폭을 뜻하는 단어. 번쩍(ピカ)하고 빛난 후에 쾅(ドン)하는 충격파가 오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


**원폭의 아이 : 사사키 사다코(1943/1/7-1955/10/25)는 일본 히로시마 시에 살고 있던 원폭의 피폭자로서,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에 있는 원폭의 아이 동상의 모델이다. 1945년 8월 6일, 2살 때에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해 폭심지에서 1.7km자택에서 낙진이 섞인 비에 의해 피폭 당했다. 동시에 피폭 당했던 모친은 몸의 이상을 호소했지만, 사다코에게는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채 건강히 성장했다. 1954년 8월의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었지만 11월부터 목 주변에 두드러기가 발생하기 시작해, 1955년 1월에는 두드러기가 수두와 같이 퍼져 얼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병은 2살 당시에 있었던 피폭의 영향으로 발생한 백혈병으로서 길어야 1년이라는 선고를 받고 입원한다. 당시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학을 접기 시작해, 1300마리 이상을 접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10월 25일에 숨을 거두고, 아이의 친구들이 모금 활동을 통해 그녀의 동상을 세워 현재에 이른다.



(마지막 수정일 : 200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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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p | 2008/05/05 21:49 | 야쇼우 시게루(弥招 栄)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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